인류의 역사는 항상 상생을 외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상반된 이해로 갈등하며 충돌과 분열을 반복합니다.
부득불 공멸 직전에야 외형적으로 봉합되는 모양을 취하게 되지만,
분열과 투쟁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지요.
그래서 인류의 역사는 ‘투쟁의 역사’라고 합니다.
투쟁을 통해서 변화하고 진보하는 문명이 득세해 왔습니다.
공멸을 피하고 상생을 바라는 인류 문명의 理想이 있기 때문이지요.
국회는 딴 세상 같은 몇몇 집단 중 대표주자이지요.
여하튼 ‘이상한 나라의 대한민국 국회’가 정상화되었습니다.
쟁점 법안 처리를 둘러싼 파행이 여야의 극적인 합의로 마무리된 거지요.
크게 기대하지는 않습니다.
국회는 국가와 국민의 이해 득실보다도 정당간, 의원간
그런데, 상생을 피하면 공멸을 만나게 됩니다.
정치인들만의 공멸이라면 대환영입니다.
그런데 싸움하는 정치인은 멀쩡하고 각 분야 국민들 생업이 공멸하니 문제이지요.
후진적인 정치분야가 모든 분야의 옥상옥으로 있으니 안타깝네요.
상생은 국회 뿐만 아니라 모든 조직, 모든 사람에게 필요합니다.
정부와 국민간의 이해 대립도 잦아지는 시대이며,
최고 권력기구인 청와대에서도 상충되는 세력이 있기 마련입니다,
각 정당 내에도 충돌하는 정파가 세력다툼을 하지요.
또한 부처간의 대립과 중앙정부와 지자체와의 충돌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사회에서도 이념과 목적이 다른 여러 단체와 조직간 마찰이 발생합니다.
산업에서는 정부정책 및 법규와 기업 현실과의 괴리,
대기업과 중소업체간의 이해 다툼, 기업과 소비자간의 마찰이 발생합니다.
기업 내에서도 기업주와 종업원간의 불신, 사용주와 노조간의 반목,
동료간의 비방과 험담 등 부정적 측면은 존재합니다.
부자와 빈자와의 대립은 부익부 빈익빈을 증대시키고 있습니다.
심지어 가정에서도 남편과 부인간 상반된 입장이 존재하고, 부모 자식간 이해 대립도 발생 합니다.
이처럼 사람이 존재하는 모든 조직과 모임에는 의견의 대립과 마찰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는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이 서로 다르고, 개별 이익과 손해에 대한 셈법 차이,
전체와 자신의 이익간 대립 때문에 분열과 다툼이 발생하는 거지요.
인간에게는 권력과 소유에 대한 강한 욕망이 있습니다.
그 욕망의 크기가 전체의 이익보다 커진다면 공멸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큰 어려움이 전개되는 2009년을 시작하면서 상생을 생각해 봅니다.
어느 국가이든 내부 분열과 대립, 투쟁의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을 기회로 포착하는 국가별 통찰력 차이에 따라 미래가 바뀝니다.
아마도 이번 세계 경제 위기가 끝날 쯤이면 국가별 희비가 크게 교차하게 될 겁니다.
위기 속에 큰 기회가 있다는 거지요.
相生을 피하면 共滅을 만납니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대한민국의 상생을 위해서 1등이 2등에게, 2등은 3등에게, 3등은 4등에게…
그리고 꼴찌에게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相生은 ‘더 나은 者’가 실천해야 할 노블리스 오블리제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