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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조선닷컴 와플레터  2007.12.27  오태진 논설위원
크게 베푸는 것도 좋지만 작은 나눔은 더욱 소중하다 

보잘것없는 시래기도 외롭고 허기진 사람들에게 따뜻한 죽 한 그릇 되기를 원한다. 몸 안에 머금은 물기, 이를테면 욕심 같은 것을 지워야 따스한 시래기죽이 될 수 있다. 얼마 전 암으로 일찍 떠난 시인은 죽음의 병상에서 이 시를 썼다. 시든 무엇이든 베푸는 마음은 가진 것 많고 적음에 상관없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신필균 사무총장이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어느 이름 없고 얼굴 없는 기부를 얘기했다. “전북에선 매년 12월이면 4년째 공동모금회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오는 이가 있습니다.

그는 ‘어느 동사무소 앞 화단에 가서 쇼핑백을 찾아가라’고 해요. 그 쇼핑백에는 수표와 함께 현금으로 800만원이 들어있기도 하는데, 늘 꽉 찬 돼지저금통도 2개가 있어요. 누군지 알아보려고도 했지만 순수한 마음이 좋아 그대로 지켜보고 있어요. 올해도 기다려집니다.”

전주 노송동사무소에 누군가가 적지 않은 돈을 놓고 간 지는 사실 8년째가 됐다. 전주 시민에겐 이미 ‘전설’이 된 이 독지가는 해마다 수백만원에서 1000만원씩 든 쇼핑백과 동전 수십만원이 들어찬 저금통을 놓아 둔다. 30대 남자 또는 20대 여성이 전화로 알려와 동사무소 직원이 달려나가 보면 돈과 함께 이런 메모지가 들어 있다고 한다. ‘올해는 눈이 너무 많이 내렸습니다. 추위에 떨고 있는 이웃에게 전해 주십시오.’ 100만원씩 묶는 ‘띠지’가 세밑을 데우는 얼굴 없는 온정을 추적할 단서가 되지만 동장은 누를 끼칠까봐 주인공 찾는 일은 포기했다고 한다.

큰 베풂도 좋지만 작은 나눔은 더욱 소중하다. 제 여유 없어도 가난마저 쪼개는 청빈(淸貧)의 마음이어서다. 시인의 귀엔 자선냄비에 던져 넣는 동전 소리가 하늘이 ‘잔돈 자선’을 반겨 내는 탄성(嘆聲)으로 들린다.

‘구세군 자선냄비에/ 지폐는 접어 두고/ 동전을 던진다/ …/ 동전을 던져 쨍그랑 소리가 나면/ 자선이 하늘에 상달(上達)하는/ 소리라기에/ 아예 지폐는 젖혀 두고/ 소리 잘 나는 동전만 골라 던진다.’
- 김시종 ‘인심’

신필균 총장은 “자기도 처지가 어려운 사람들이 더 기부를 많이 한다”고 했다. 교사로 사회에 첫발을 디디면서 첫 월급을 기부한 선생님, 점심을 굶으며 한 달치 점심값을 모아 보내온 익명의 기부자, 하루 수익금을 몽땅 보내온 순대 노점상 부부…. 매달 일정액을 내는 이들도 10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 모든 손길이 빈자일등(貧者一燈) 같은 사랑이다. 부처에 공양한 수만 등불이 바람에 꺼져도 가난한 여인이 정성으로 켜 올린 등불 하나는 오래도록 무명(無明)세계를 밝혔다. 감나무에 외롭게 매달린 까치밥은 우리네 시골의 빈자일등이다. 어르신들은 초겨울 배고픈 까치가 쪼아 먹으라고 감 몇 개는 따지 않고 남겨뒀다. 살림은 넉넉지 못해도 우리는 그렇게 더불어 살 줄 알았다.

‘감나무 가지 끝에/ 홍시 하나가/ 까치밥으로 남아 있었다/ 서릿바람 불고/ 눈발 날려도/ 가지 끝에/ 빨갛게/ 남아 있었다// 밤새 꺼지지 않던/ 빈자일등.’
- 윤효 ‘홍시’

한 해의 끝, 새해의 경계에 서면 좌절과 극복, 절망과 부활이 맞부딪친다. 그러나 대립과 갈등과 부정(否定)은 언제나 참회와 정죄(淨罪)와 긍정에 자리를 내주고 물러가고야 만다. 그 사색과 성찰은 한 해라는 산에 오를 때가 아니라 한 해의 마루턱을 내려올 때에야 비로소 얻는 깨우침이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 고은 ‘그 꽃’

지하철역 모금함을 열어보면 돈만 나오는 게 아니라고 한다. ‘애인과 헤어져 이 반지가 필요없어요. 좋은 일에 쓰세요’라는 사연과 함께 반지가 들어 있기도 한다. ‘부모님께 드리려던 선물인데 더 어려운 이웃들에게 주세요’라며 상품권을 넣은 이들도 많다.
깊이 박힌 못을 이보다 더 시원스레 뽑아내고 가족과 이웃 사랑을 이보다 더 알싸하게 표현한 해넘이도 드물겠다. 지난 한 해 남의 마음에 박은 못, 내 몸에 박힌 못 모두 뽑아내고 빈 가슴, 맑은 머리로 새해를 맞아야겠다. 작고 당연한 것을 축복으로 여기는 세밑이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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